30도에서 35도 사이의 담금주용 소주에 과일이나 약초를 넣고 오랜 기간 숙성시켜 그 효능을 추출하고자 하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이어 내려왔습니다. 복분자주, 머루주, 인삼주 등은 물론 노봉방, 송근봉, 백수오까지 온갖 희귀 약재들을 술에 담가 먹는 우리의 술 문화 뒤에는 건강한 삶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때는 그랬지~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50년여 전만 하더라도 마을 장터에 갈 때면 약장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뱀이나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각종 묘기를 부리고, 약 한 병만 먹으면 가벼운 기침에서부터 죽을병까지 싹 고칠 수 있는 이른바 ‘만병통치약’을 파는 장사치들은 때때로 과격하고 위험천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차력쇼를 선보이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이목을 끌었던지, 기사에 보면 약장수 주변에 학생들은 물론이고 집안 살림을 때려치우고 구경하러 나온 아녀자들까지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숙련된 약장수들은 절대로 한 가지의 효능을 콕 집어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간에도 좋고 폐에도 좋고, 심장과 대장 등 오장육부에 끼치는 효험을 줄줄이 나열했었습니다. 그중 한 가지 효과만 걸리면 어느 정도 효능이 있음이 입증되는 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화려한 언변과 기이한 볼거리 등을 보고 있다 보면 그게 다 사기인 줄 알면서도 사게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탄탄하게 짜인, ‘안 사고는 못 배길’ 광고라 할 수 있습니다.
밤에 빗장 걸린 문을 열어 주는 술?
담금주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무가 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뒤틀려 특이하게 형성된 나무뿌리나 벌과 애벌레를 통으로 술에 담근 말벌집, 독사가 담긴 뱀술 등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부분이 극히 적었습니다.
그런데도 담금주를 기꺼이 마시는 것은 그것이 특이하게 생기거나 특별한 이야기를 품은 자연의 신비를 마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근래 들어 가장 인기가 많은 담금주는 야관문주(夜關門酒)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민간에서 입소문으로 퍼지던 담금주의 세계를 뛰어넘어 각종 대형 주류기업에서도 야관문주를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야관문주는 전국의 마트에 유통되고, 심지어는 술집에서도 팔 정도로 인기 좋은 술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 이름 자체가 광고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자를 풀이하면 ‘밤에 빗장 걸린 문의 술’인데, 이것을 ‘밤에 걸린 빗장을 풀어주는 술’로 풀이하여 받아들이면 언제든 밤에 환영받는 술이 됩니다.
또한, 밤과 관련된 술이라고 하여 남자의 정력에 좋은 술이라고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영화의 제목으로까지 사용될 정도였으니 오늘날 야관문이 갖는 상징성을 가늠해 볼만합니다.
비수리가 뭔가요?
사실 야관문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풀의 이름이라 기보다는 약재명입니다. 한글로는 비수리라고 불리는 이 풀은 싸리 속 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전국의 양지바른 들과 산에서 자생하는 풀입니다.
약 1m까지 자라고 가지가 꽤 거칠고 억세서 싸리나무를 대신해 빗자루로도 사용합니다.
약초로 사용할 때에는 8월경, 황백색의 꽃이 필 무렵에 채취하여 건조해 사용합니다. 꽃이나 열매보다는 뿌리와 줄기, 이파리를 약초로 사용하기 때문에 영양분이 꽃과 열매로 분산되기 전에 채취하는 것이 약재의 효과를 내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비수리의 밝혀진 과학적 효능은 소염작용, 혈당 강하, 항암작용입니다.
한의학에서도 간장과 신장을 보호하고, 폐와 기관지를 강화하며, 세균을 억제해 염증성 질환이나 종기에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는 정력 강화에 대한 효능은 어떤 전문 서적에서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문은?
도대체 이 정력 강화는 어디에서 근거한 소문일까? 힌트는 비수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약재명들에 숨어있습니다.
야관문이라는 이름이 제일 널리 알려졌지만, 폐문초, 야폐초, 야합초 등의 다른 이름도 있습니다. 이는 밤에 잎이 오그라들어 서로 붙어있는 습성에 따라 지어진 것입니다.
즉, 야관문의 門은 진짜 사람이 오가는 문이 아니라 이파리를 보고 마치 밤이 되면 문을 닫는 것처럼 이파리가 붙는다는 비유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생태적인 습성을 보고 지어진 ‘야관문’이라는 이름이 ‘밤에 빗장 걸린 문을 여는 술’로 이름이 와전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푼 기대를 안고 술을 담갔을지 생각해 보면 입소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게 흘러가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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