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은 중국어로 자지앙미엔(Zhajiangmian, 炸醬麵)이라고 표기하며, 장(醬)을 볶아 면과 함께 먹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야채와 돼지고기를 넣고 식용유와 중국 된장(춘장)으로 볶은 양념을 국수와 비벼 먹는 한국식 중화요리입니다.
짜장면의 유입
짜장면은 중국인이 한반도에 이주하면서 가지고 온 음식입니다. 중국인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때입니다. 1884년 인천에 청국조계가 설정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교들이 이주하여 이 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1890년대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서 건너온 부두 근로자인 큐리(苦力·하역 인부)들이 인천항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던 음식이 짜장면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청조계지를 중심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파는 중식 음식점이 많이 생겼는데, 흔히 '원조 짜장면집'으로 알려진 공화춘은 1905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짜장면이 국내에 남게된 배경
일제강점기에 짜장면은 그렇게 대중적인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대중의 인기를 끈 중국 음식은 호떡이었습니다. 그때의 호떡은 지금처럼 군것질의 호떡이 아니었습니다. 화덕에 두툼하게 구운 빵으로, 차와 함께 끼니로 먹었습니다.
호떡 가게가 얼마나 많았는지 화교들에 의한 국부의 해외 유출을 걱정하는 말이 돌았습니다. 1924년 6월 26일 자 동아일보에는 "경성부 내 설렁탕집이 대략 100군데인데, 호떡집은 대략 150군데나 된다"며 당시 시장 상황을 알려주는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화교는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남북분단과 중국의 공산화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국교 단절로 이어지는 정치 상황에 놓인 화교는 이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반도를 떠나는 화교는 더 늘어났고 그 이후에도 화교 인구는 정체되었습니다. 한국 정부가 화교의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한국전쟁 후 얼마 남지 않은 화교는 재산권 행사에 대한 제약으로 큰 사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작은 식당을 열고 요리가 아닌 끼니의 음식을 내기 시작한 것인데, 당시 미국의 무상원조로 지원된 밀가루를 이용한 저렴한 국수가 주요 메뉴로 등장을 하였습니다. 캐러멜이 혼합된 공장 춘장이 등장하면서 원가는 떨어지고 일은 더 쉬워졌습니다.
한국산 짜장면의 탄생
1960년대에 들어 양파의 대량 재배로 짜장면의 맛이 획기적으로 바뀌었고 동시에 정부의 혼분식 장려 운동은 짜장면이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급격한 수요의 증가를 보고 한국인도 짜장면 시장에 뛰어들었고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의 취향에 맞춰진 배달 시스템도 짜장면 성장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루 700만 그릇이 팔린다는 짜장면을 만드는 사람이 거의 다 한국인이고 이를 먹는 사람도 한국인이니 짜장면을 한국 음식이라 하여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짜장면은 외래음식으로는 유일하게 한국의 100대 문화 상징에 들어가며 정부의 중점물가 관리 품목으로 선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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