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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속 음식이야기

귀신을 물리치는 팥죽을 먹게 된 이유

by 허브마스터 202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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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동지였습니다. 동지가 지나고 오늘은 매우 추운 동장군이 습격을 하여 온몸이 얼어붙었습니다. 어제 포스팅을 했어야 했는데 게으른 탓에 오늘 동지에 팥죽을 먹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요즘 심야괴담회에서 자주 나오는 게 팥과 소금인데 우리 선조들이 왜 팥으로 귀신을 물리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팥죽 사진
팥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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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의 정의와 특징

 

팥죽은 팥물에 멥쌀을 넣고 끓인 죽입니다.

 

팥죽은 애초에 노약자 및 병자를 비롯한 일반인의 보양식으로 널리 애용되던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어느 시기로부터 팥이나 팥죽이 띠는 붉은색으로 인하여 귀신을 쫓는데 주요한 상징물이 되었고, 이것이 다시 동지의 우주 변화 시각과 연계되면서 동지팥죽 풍습으로 형성·전개되었습니다. 동지 때문에 팥죽을 먹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팥죽이 동지와 맞물리면서 그것이 크게 유행하는데 계기가 되었을 뿐입니다. 역사 문헌에서는 동지팥죽이 고려시대 말기에 처음 보이지만 아마도 그 역사는 훨씬 이전으로 소급될 것입니다.

 

 

팥죽의 역사

 

팥죽과 그와 관련된 풍습의 역사가 어느 시대까지 소급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현재까지는 고려 말 학자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과 이제현(李齊賢)의 『익재집益齋集』에 나오는 두죽(豆粥), 두탕(豆湯) 등이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이에 의하면 동지는 음(陰)이 극도에 이르러 다시 양(陽)이 생기는 천지춘(天之春)이라 합니다. 이때 팥죽을 먹어 오장(五臟)과 혈기(血氣)를 조화롭게 합니다. 또한 팥죽으로 음사(陰邪)를 씻어내고 물리친다고 합니다.

 

동지에 고려사람(동인東人)은 반드시 팥죽을 먹는다. 집집마다 서로 팥죽을 끓여 나누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노인을 공경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익재(益齋) 이제 현 집안에서는 채색 옷을 입고 부모님께 헌수(獻壽)도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동지팥죽으로 양귀(禳鬼)를 하고, 차례(茶禮)를 모시며 부모에게 공양하는 전통은 이어졌다고 합니다. 관아(官衙)의 동짓날 망하례(望賀禮)에는 팥죽을 대접하고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당대에는 팥죽이 복더위를 물리치거나 노인의 기력을 회복시키는 보양식이기도 했습니다.

 

팥죽을 대추와 함께 끓이기도 했고, 꿀을 타서 먹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팥죽 풍습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지팥죽을 집집마다 서로 나누거나 부모에게 헌수하는 등 풍습은 언젠가부터 사라졌습니다. 팥죽 풍습 지속과 변화를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중국 양(梁)나라의 종름(宗凜)이 6세기에 양자강 중류 초(楚) 나라 세시에 대하여 찬술 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7세기 초엽 초(楚)의 두공섬(杜公贍)이 증보 가주(加注))에 보면 동지에 해 그림자를 재며, 또한 붉은팥(적소두赤小豆)으로 죽을 쑤어 역귀(疫鬼)를 쫓는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와 관련하여 동짓날에 죽은 공공씨(共工氏)의 아들이 돌림병을 전염시키는 역귀(疫鬼)가 되었다는 설화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귀가 붉은팥을 두려워하기에 동지에는 팥죽을 끓여 역귀를 막는다고 합니다.

팥 사진

 

이 내용은 조선시대 중기에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듯합니다. 당시 이식(李植)은 자신의 문집 『택당집澤堂集』에서 “조선의 동지팥죽 풍습이 중국 형초 지방에서 팥죽으로 역귀를 쫓는데서 답습되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그 후 홍석모(洪錫模)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그대로 보입니다. 그러나 동지팥죽 풍습은 옛 초나라가 있던 형초에서 전파된 것이 아닙니다. 동아시아 일원의 ‘동지와 붉은색 팥에 대한 공통된 관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팥죽에 관한 내용

 

▶ 팥죽의 조리법

 

팥죽의 일반 조리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깨끗이 씻어서 물기를 뺀 팥에 물을 붓고 끓입니다. 이때의 팥물은 쓴맛이 있으므로 버리고, 다시 물을 붓고 팥이 충분히 퍼지도록 푹 익힙니다. 이렇게 삶아진 팥을 체에 넣고, 물을 부으며 주걱으로 으깨 가며 껍질을 제거하면서 팥물을 내립니다.

 

다음에는 팥물의 웃물만 떠서 솥에 붓고 멥쌀을 넣고서 끓입니다. 멥쌀이 어느 정도 퍼지면 여기에 팥물 아래 가라앉은 앙금을 넣고 골고루 섞어서 다시 한번 끓입니다. 이때 새알심을 넣습니다. 잠시 후 새알심이 떠오르면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조금 더 끓여서 팥죽을 완성합니다. 새알심은 보통 찹쌀가루나 수수가루로 조그만 새알처럼 만듭니다.

 

▶ 팥죽을 먹는 이유

 

팥죽은 동지에 먹는 대표 절식(節食)입니다. 동지는 양력으로 12월 21일이나 22일입니다. 이 날은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반대로 낮은 가장 짧습니다. 그러나 동지를 지나면 아주 조금씩이지만 밤은 짧아지고 낮이 길어집니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우주의 대전환이 이루어집니다. 한 해의 기운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한 해의 기운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동지를 작은설 또는 아세(亞歲)라고 부릅니다. 동지는 또 하나의 새해 첫날입니다. 이 날 팥죽을 먹어야 진정 한 살을 더 먹는 것입니다.

 

작은설에는 모든 액을 없애고 잡귀를 쫓으려고 팥죽을 쑤어 먹습니다. 사실상 벽사(辟邪) 역할을 하는 것은 팥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띠는 붉은색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생명과 죽음을 상징하는 피’, ‘피의 붉은색’, ‘땅의 피인 황토와 그것이 띠는 붉은색’ 등과 일련의 상호 관련된 농경민족 대표 제액 상징물입니다.

 

이러한 팥만 뿌려도 제액 효험은 있다고 합니다. 가령 액막이 해물리기 등에서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절인 동지에는 팥을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팥죽을 끓여서 그것으로 먼저 제액하고, 시절음식으로도 쓰고, 조상 가신(家神)을 위하기도 합니다.

 

팥죽은 설날의 떡국과 대비됩니다. 아세가 설날보다 훨씬 고형(古形)이기에 제액을 상징하는 팥죽이 절식으로 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의 떡국에는 제액 의미가 없습니다.

 

▶ 동지와 팥죽의 관계

 

동지가 동짓날 중에서 열흘 안쪽에 닿으면 애동지라 합니다. 애동지는 아이들에게 좋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이가 많이 죽습니다. 애동지에 팥죽을 쑤면 아이들을 보살피는 삼신할머니도 신령이기에 꼼짝을 못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팥죽 대신 팥시루떡을 해 먹는다고 합니다. 동지가 중순에 닿으면 중동지라 하고, 하순에 닿으면 노동지라 합니다. 각각 중년과 노인이 불운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모두 팥죽을 끓여서 먹는다고 합니다.

 

동지에 팥죽을 쑤면 식구들이 먹기 전에 뜨거운 팥죽을 바가지에 담아 숟가락으로 뜨거나 솔가지에 묻혀서 부엌, 장광, 마루, 우물, 곳간, 측간, 울타리, 대문 등지를 다니면서 조금씩 뿌린다고 합니다. 이때에 “액을 물리자!” 또는 “잡귀야 물러가라!” 하고 반복해서 외칩니다.

 

팥죽은 집안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돌면서 뿌리면 더욱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책력을 보아 동지 절입(節入) 시각, 곧 동지 시(時)에 맞추어 뿌리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경쟁이(경객經客 또는 법사法師)를 불러 안택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덕을 본다고 합니다. 또한 집안의 조왕, 성주, 터주, 용단지, 측신, 문신 등을 모신 장소에 팥죽 한 그릇씩을 가져다 놓기도 합니다. 이는 가내 평안을 빌기 위하여 팥죽으로 집안 신령들을 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식구들은 팥죽을 먹는다고 합니다.

 

전라북도 무주·진안·장수 등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에 서린 액과 잡귀를 쫓아내기 위하여 음력 정초에 팥죽제를 지냅니다. 밤에 부녀자들이 풍장을 울리며 마을 고샅길 등지를 돌면서 이곳저곳에 팥죽을 뿌립니다. 마을 어귀와 당수나무에는 반드시 뿌립니다. 돌림병을 막기 위해서, 기우제의 일환으로 ‘디딜방아 뱅이’를 할 때도 마을 어귀에 Y자 모양으로 거꾸로 세워 놓은 디딜방아에 팥죽을 뿌리고 부녀자의 피 묻은 속곳을 건다고 합니다.

 

가정에 따라서는 팥죽으로 동지차례를 모십니다. 조상에게 시절 음식을 올리면서 작은설 인사를 하고, 하늘과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를 지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동지불공을 드립니다.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로 집안의 평안을 빌기 위하여 팥죽으로 불공을 드립니다. 사찰에서는 팥죽을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기도 합니다.

 

팥죽은 가장 일반화된 초상집 부조(扶助)의 하나였습니다. 동네에 초상이 나면 새알심을 넣지 않고 맑게 끓여갔습니다. 팥죽으로 상례 기간 내내 문상객을 대접했습니다.

 

 

참고문헌

 

세시풍속(국립문화재연구소, 2001~2003), 조선의 동지팥죽과 그 사회성(최덕경, 역사민속학20, 한국역사민속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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