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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요리/한국의 전통음식

태평성대를 바라는 백성들이 만든 음식, 영주 태평초

by 허브마스터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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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초는 태평추로 불리기도 하며 메밀묵에 묵은 김치와 돼지고기를 넣고 끓여낸 전골의 일종으로 조선의 21대 국왕 영조(英祖)의 탕평정책을 상징하는 음식인 탕평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 경상북도 영주시의 향토음식입니다. 이 글에선 태평초에 담긴 역사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태평성대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태평초
태평성대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태평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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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의 메밀요리: 묵밥과 다양한 메밀음식

 

경상북도 영주시는 소백산맥이 지나가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경상북도의 산간지역은 기후가 서늘하고 토양이 건조하여서 메밀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춘 곳입니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하여 예로부터 영주시를 비롯한 인근의 봉화, 영양, 안동, 예천, 문경 등지에서는 메밀을 많이 재배하였습니다.

이들 지역에서 메밀을 많이 재배하다 보니 자연스레 메밀을 이용한 음식도 발달하였습니다. 그 종류를 대략 열거하여도 메밀국수, 메밀떡국, 메밀만두, 메밀묵, 메밀묵채, 메밀범벅, 메밀빙떡, 메밀수제비, 메밀전병, 묵밥 등 실로 다양합니다.

 

그중에서 영주시를 비롯하여 인근 안동, 문경 등지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음식으로 묵밥이 있습니다. 차가운 육수에 메밀묵과 묵은 김치, 야채를 넣고 참기름과 깨소금, 김가루 등을 얹어서 먹다가 조밥을 넣어 비벼 먹는 묵밥은 이 지역의 별미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영주시의 향토음식 태평초: 메밀묵과 돼지고기의 조화, 탕평정책을 상징하다

 

경상도 북부지역의 메밀을 이용한 음식의 전통은 꽤 오래된 것이어서 16~17세기 이 지역에서 저술된 고문헌에서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안동의 김유(金綏, 1491~1555)가 지은 『수운잡방(需雲雜方)』과 1670년경 영양군의 안동 장 씨 부인이 지은 『음식디미방』은 경상도 북부지역의 음식문화를 반영한 고조리서입니다.

 

우선 두 조리서에는 메밀국수와 메밀만두 만드는 법을 공통적으로 수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음식디미방』에는 메밀국수와 메밀만두, 메밀 전 만드는 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메밀국수는 더운 국수뿐만 아니라 ‘차면법’이라 하여 메밀면을 오미자 국물에 시원하게 말아먹는 냉국수 만드는 법까지 수록하고 있습니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다양한 메밀음식 가운데 앞서 언급하지 않은 유독 특이한 음식이 있는데 바로 영주시의 향토음식인 태평초입니다. 태평추 또는 묵두루치기, 돼지묵찌개라고도 불리는 태평초는 양념한 돼지고기를 참기름에 볶다가 묵은 김치를 넣고 멸치 육수를 부은 다음 메밀묵과 당근, 대파, 황백지단을 얹어 끓여 먹는 일종의 전골 음식입니다.

 

앞서 영주시의 별미로 소개한 묵밥이 메밀묵과 묵은 김치 등을 차가운 육수에 말아 먹는 것이라면 태평초는 따끈하게 끓여 먹는 음식으로 서로 대비됩니다.

그런데 음식이름에 “나라가 안정되어 아무런 근심 없이 평안하다”는 뜻을 지닌 ‘태평(太平)’을 굳이 사용하였는지 그 유래가 궁금해집니다.

 

태평초가 유래한 연원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조선 21대 국왕 영조(英祖)가 시행한 탕평정책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던 ‘탕평채(蕩平菜)’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전하여집니다.

 

탕평채는 흰색의 청포묵과 붉은 색의 볶은 고기, 파란색의 미나리, 검은색의 김을 주재료로 하여 만든 무침입니다. 이 네 가지 재료의 색깔은 각기 당시 서인, 남인, 동인, 북인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즉 탕평채의 재료가 조화를 이루어 좋은 음식이 된 것처럼, 어느 당파든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부당함이 없도록 공평무사하게 등용할 것을 천명하여 정사를 바르게 베풀겠다는 의미가 반영된 것입니다.

 

 

불행한 역사 속의 순흥: 경상북도 영주시의 음식 태평초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

 

태평초라는 음식 이름이 유독 경상도 지방 그것도 영주에서 생겨난 것은 순흥(順興)과 관련된 불행한 역사의 기억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은 조선시대에는 종3품의 도호부가 설치된 독립된 행정단위였습니다. 불행한 역사의 첫 장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복위운동의 실패와 관련됩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맞서던 금성대군은 1455년(세조 1년)에 이곳 순흥으로 유배를 오게 됩니다.

금성대군은 2년 후인 1457년(세조 3)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복위를 추진하였으나 밀고를 당하여 실패하였습니다. 이때 한양에서 파견한 관군에 의해 수많은 순흥 사람들이 도륙을 당하여 냇가가 핏물로 붉게 변할 정도였다고 하며 가산이 불태워지는 참변을 겪었습니다. 

 

또한 순흥은 역향(逆鄕)으로 낙인이 찍혀 인근 풍기, 봉화, 영주 등에 흡수되어 아예 순흥이라는 지명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1484년(성종 15)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외관직(外官職)의 편제에는 순흥이 빠져있습니다. 그 후 2백여 년이 지난 1683년(숙종 10)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순흥도호부가 회복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1728년(영조 4) 경종(景宗)의 의문의 죽음을 복수하고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 탄(密豊君 坦)을 추대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입니다.

 

이인좌(李麟佐)와 함께 반란의 주역이었던 경상도의 정희량(鄭希亮)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공교롭게도 순흥에 거주하였습니다. 본래 정희량의 집안은 경상도 안음(安陰,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 세거(世居) 하였으나 그의 부친 때에 순흥으로 이사하면 발복(發福)한다는 지관의 조언을 듣고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이상과 현실: 태평초와 이인좌, 정희량의 역할

 

보통 이인좌의 난으로 알려진 무신란은 이인좌가 반란의 중심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 가장 큰 규모의 반란군을 조직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던 인물은 정희량이었습니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 대구 감영 앞에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세워지고 반역향으로 지목된 경상도는 이후 60여 년간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고, 흥선 대원군이 탕평책을 실시할 때까지 130여 년이 넘도록 관로진출이 막히는 불이익을 받게 되었습니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이나 정희량의 거사(擧事)가 지배자의 역사에는 반란과 대역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특정 인물이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특정 집단이 국가권력을 농단하는 것을 바로 잡고자 항거했다는 의미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국 영주의 태평초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 민본사상과 덕치(德治)를 베풀어 태평성세의 실현을 꿈꾸었던 조선유교사회의 이상적 염원이 역사의 아픈 기억과 함께 음식이름에 고스란히 투영이 되었던 것입니다.

 

 

탕평채, 한국음식에서의 화합의 상징

 

탕평채, 한국음식에서의 화합의 상징

녹두묵을 만들어 잘게 썰고 고기볶음, 미나리, 김을 섞고 초장(醋醬)으로 무쳐 주로 봄에 먹는 음식입니다. 묵청포라고도 합니다. 탕평채라는 음식명은 영조 때 여러 당파가 잘 협력하자는 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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